승동교회에 관하여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개신교 관련 명소들 중에 [승동교회]가
서울에 가면 볼 수 있는 개신교 관련 명소들 중에 [승동교회]가 있습니다. 승동교회는 어떠한 교회예요? 그리고 승동교회는 옛날에 무엇으로 유명했던 교회이며, 서울시 지정 문화유적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ai답변을 무단으로 복사붙이기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재림 안식교 이단이 와서 답변을 하면 재림 안식교 이단의 답변을 채택하는 것은 재림 안식교 이단의 활동을 적극 돕는 것이 되니 이점 주의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질문 감사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승동교회를 생각하면 연동교회가 떠오릅니다. 자료입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가 아닌 교회당이 그렇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서울시유형문화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교회 건물.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7-1 (인사동) 지도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소속된 교회이다. 이 교회는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포맨 무어(Samuel Foreman Moore 1860~1906, 한국명 모삼율)가 지금의 롯데호텔 부근의 곤당골에서 시작한 교회를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승동교회는 당시 백정교회로 알려졌는데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최하층민이었던 백정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박씨(朴氏) 성을 가진 백정이 아들을 이곳 학당으로 보내 학문을 배우고 개신교 신자가 되게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열병으로 사경을 헤메자 무어 목사가 친분이 있던 임금의 주치의를 대동하여 그를 치료하여 완쾌시켰다. 박가 백정은 감복하여 개신교도가 되었고 무어 목사에게서 성춘(成春)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박성춘으로 인해 많은 백정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문에 많은 양반들이 백정들과는 같이 예배를 볼 수 없다며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다.
곤당골 교회는 몇 차례 옮긴 뒤 1905년 지금의 인사동에 자리를 잡고 중앙교회라는 종전의 명칭을 지금의 승동교회로 변경하였다. 1906년 무어 목사가 사망하고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목사가 주임 목사가 되었으며 이때 조선 정치사의 중요 인물로 평가되는 몽양 여운형이 젊은 시절 목사가 되기 위해 승동교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이 교회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학생시위가 일어났으며, 1939년에는 이 교회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를 설립하였다. 1969년 예배실 증축공사를 하였으며, 그뒤 교회부지를 확장하여 교육관을 건립하였다.
건물의 평면은 직사각형이고 지붕은 십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형태가 웅장하고 동적(動的)으로 건축되어 있다. 측면은 2단 박공으로 처리하여 수직 상승감을 더하였고 창문의 아치는 반원형이다.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하고 고쳐 지어졌으나 건물의 기본적인 형태나 구조는 변함이 없으며 보존상태가 좋다.
[네이버 지식백과] 승동교회 [勝洞敎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소속교회.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Moore,S.F.)와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승동(공단골)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다. 무어는 봉건사회의 잔재인 계급제도 타파에 관심을 가지고 전도사업에 노력한 결과 백정들이 많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한때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1905년 8월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으며,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2월 20일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壁)을 중심으로 전문학교 대표들이 모여 제1회 학생지도자회의가 이 곳에서 열렸으며, 거사 직전에는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 1,500매가 각 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교인들의 민족정신과 함께, 교회의 위치가 탑골공원에 인접해 있어서 거사진행을 돕는 데 쉬웠기 때문이었다.
일제 말엽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1939년 외국인의 주도권에서 벗어나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신학교가 이 교회에서 출발하였다. 이 학교가 오늘날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이다.
1959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나뉘면서 합동측의 총회가 이곳에서 진행되어 합동측 교단의 모체가 되었다. 흔히 합동측을 ‘승동파’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고신(高神)측과의 재분열로 교회건물과 대지를 둘러싼 법정소송이 벌어져 혼란에 직면했으나, 1971년 문제가 일단락되었고 그 뒤 발전을 거듭했다.
1993년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승동교회는 해외 선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고, ‘승동성경대학’을 설치 교인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과 ‘선교위원회’를 통한 아르헨티나 · 중국 · 파키스탄 · 탄자니아 · 필리핀 등에 대한 간접적인 선교지원과 함께 일본 · 필리핀에는 직접 선교사를 파견하는 선교열의를 보였다.
승동교회는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2009년 116주년을 맞이하였으며, 현재 인도 · 키르키즈스탄 · 아르헨티나 등에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승동교회백년사』(홍치모, 승동교회, 1996)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김광수, 기독교문사, 1978)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上)』(차재명, 새문안교회, 1928)
승동교회 홈페이지(www.seungdong.org)
[네이버 지식백과] 승동교회 [勝洞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교회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소속된 교회로 1893년부터 전도를 시작하였다. 1894년 현재의 위치에 초가 한 채를 매입하여 교회를 열었다. 1898년 예배처에 연동소학교를 설립하였고, 1900년 게일(James Scarth Gale)이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성장기를 맞았다. 1907년에는 '소아회'라는 명칭으로 최초로 주일학교를 탄생시켰으며, 일제 강점기에 많은 민족지도자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선교와 독립운동, 민족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94년 《연동교회 100년사》를 펴냈으며, 11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게일 이후 담임목사는 함태영(咸台永)·전필순(全弼淳)·백리언(白理彦)·김형태(金炯台)·이성희(李聖熙) 등으로 이어졌다. 부설기관으로 연동신용협동조합·연동동산·강화수양관·연동복지원(연동원로관·연동어린이집·누상어린이집·작은형제의집·연동실버아카데미) 등을 운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동교회 [蓮洞敎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연동교회[ 蓮洞敎會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
1894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삼열(牟三悅, Moore,S.F.)의 조사(助事) 김영옥(金泳玉)과 천광실(千光實)이 시가전도에 힘쓴 결과 얻어진 신도들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이길함(李吉咸, Lee Graham)과 조사 서상륜(徐相崙)의 지도로 이미 전도받은 신도들이 회동하여 현 위치에 있었던 초가 한채를 매입하여 예배처소로 삼았다. 이 곳을 중심으로 종로5가 일대의 전도에 힘쓴 결과 교회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게일(Gale,J.S., 奇一)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1,000여 명이 모이는 당시 가장 큰 교회로 육성하였다. 1904년에 조사 고찬익(高燦益)을 장로로 장립하여 처음으로 당회(堂會)가 조직되었다. 1907년에는 1, 200석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연동교회가 이처럼 급성장한 데에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았던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게일 목사와 고찬익 장로를 비롯하여 독립협회 회원들, 특히 이상재(李商在), 김정식(金貞植), 이원긍(李源兢), 홍재기(洪在箕), 유성준(兪星濬), 박승봉(朴勝鳳), 민준호(閔濬鎬) 등이 교회를 위해 크게 활약하였다.
한편, 1894년 현 연못골 대지를 미국 북장로교에서 매입하여 선교부 기지로 사용하면서 경신(儆新)과 정신(貞信)의 두 중등학교가 연동교회 옆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 결과 연동교회는 교육적이며 지성적인 귀족교회로 알려졌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연동교회는 최남선(崔南善), 이갑성(李甲成), 이상재, 함태영(咸台永), 신(辛)마리아, 신의경(辛義卿), 김필례(金弼禮) 등 민족지도자들의 독립운동의 온상이 되었다. 연동교회의 역대 목사는 게일, 함태영, 전필순(全弼淳), 백이언(白理彦), 김형태(金炯台), 이성희(李聖熙)로 6대를 이어오고 있다.
2009년 현재 2,000여명의 교인이 있다. 유치원 · 청소년학교(야간) · 노인학교를 경영하고, 30여 개의 국내 개척교회를 지원,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연동교회 110년사』(고춘섭 편저, 연동교회, 2004)
『연동교회 100년사』(연동교회100년사 편찬위원회, 연동교회, 1994)
『연동교회 90년사』(연동교회90년사 편찬위원회, 연동교회, 1984)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Harry,A.Rhodes, 1934)
[네이버 지식백과] 연동교회 [蓮洞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