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
i
회원가입시 광고가 제거 됩니다
어니스트 베델(배설)이 왜 그렇게 조선에 헌신했나 어니스트 베델이 왜 그렇게 조선에 헌신을 해 그런 업적들을 남겼는지
어니스트 베델이 왜 그렇게 조선에 헌신을 해 그런 업적들을 남겼는지 궁금해서 써봅니다 최대한 공신력 있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받은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裴說)은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그는 1904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여 일제 침략을 비판하는 보도를 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일제의 집요한 추방 공작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병을 얻어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은 1968년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追敍)하였다.
베델(Bethell)에서 배설(裵說)이 되기까지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보도들은 한국인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다. 국내에서도 반일감정과 무장투쟁의 움직임이 고조되어 갔으며, 그의 기사가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감에 따라 국제 사회에서도 일본의 입지가 다소 애매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는데 있어 방해물이었고 베델은 일본 통감부의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영국에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하여 공안을 해쳤다.”는 이유로 베델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따라 베델은 2차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근신형, 금고형 등을 포함하여 일본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베델은 1909년, 향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심장 확장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으나 길었던 두 차례의 재판 과정과 심적인 부담이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베델이 사망한 다음 날, 그는 양화진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대한매일신보사장 대영국인 배설의 묘'라고 베델의 한국 이름인 ‘배설’이 새겨져 있다. 베델의 장례식은 한국인 참배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베델 추모시를 모집하기도 했는데 그 중 6편을 게재하기도 했다.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서 애쓴 그에게 보내는 한국인의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베델은 한국의 자강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영국인 베델로 태어나 한국인 배설로 잠들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잇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일대에는 각종 신문사가 모여 있는데, 그 한가운데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가 있다. 베델이 사망하고 난 뒤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일보로 흡수되었다가 1938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명칭이 바뀐 뒤 현재의 서울신문이 되었다. 서울신문은 그 제호 앞에 축약부호가 들어가는데 대한매일신보를 생략한 표시이다. 또, 대표 색깔인 주황색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과 창간정신을 계승한 열정을 뜻한다고 밝히고 있다.
베델은 그의 삶처럼 고난한 일생을 살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저 당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여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위기에 빠진 대한의 운명에 스스로의 삶을 던지는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행보와 수탈당하는 약소국의 부당한 현실을 직접 마주한 그는 신념에 따라 살았다. 당시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베델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보여준 도덕적이고 용기있는 행동 때문이 아닐까 싶다.